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한국 소녀가 인신매매당해 여관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난투극을 벌인 끝에 경찰의 도움으로 구출한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조선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는 여성들이다"라고 말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여성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인 한인여학원과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해 여성 교육을 선도했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해, 이승만은 여성 참정권을 강력히 추진해 결국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는 스위스(1971년)나 프랑스(1944년)보다도 빠른 결정으로, 대한민국이 여성 인권 면에서 선구적인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신분과 계층을 초월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은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어 이루어졌지만, 그는 모든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과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유일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토지개혁과 평등의 기틀 마련
건국 후 이승만은 대규모 토지개혁을 단행해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싸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을 평등하게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은 이후 한국의 경제 발전과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
6.25 전쟁과 이승만의 결단
6.25 전쟁 당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미군 무초 대사가 새로운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제안했을 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며 "끝까지 대한민국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그의 강한 민족적 자주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반면, 김일성은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도피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가 있다. 당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경로를 제공했으며, 폭파로 인한 사상자는 대부분 경찰들로 밝혀졌다.
전쟁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지도자
전쟁 기간 동안 이승만은 최전선에서 장병들과 함께하며 사기를 북돋우는 연설을 279회나 진행했다. 그는 군인들과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헌신했다.
왜곡된 역사와 그 너머
오늘날 일부 진영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평가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 여성 참정권 확대, 토지개혁,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기반 마련에 기여한 업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업적을 조명한 영화 ‘건국전쟁’은 그의 리더십과 비전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과거의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진 지도자로서의 이승만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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